Haruki Murakami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약간 디스ㅋ)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양억관 옮김
민음사

“미안해 하루키씨.”

이 글은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작가에 대한 약간의 삐짐과 책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갈굼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 하루키씨 책을 읽은 것은 ‘상실의 시대’. 단언컨대 그 책은 일본의 현대 소설가운데 탑 10안에 드는 매우 괜찮은 소설이다. 특히 압도하는 마지막 장면은 흔한 감동을 넘어 물리적으로 몸에 전율을 일으키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하루키의 소설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한다.) 이후 읽은 ‘해변의 카프카’ 말이 필요 없다.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신비와 현실을 오가는 소설 중에서는 가장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개인적으로 괜찮았던 것은 1Q84 1권. 여기서 말하는 것은 1권만 이다. 절대 2권3권이 아니다. 나는 1Q84가 결말이 난 소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열린 결말도 아니다. 그냥 쓰다가 만 소설이다. (미안해! 나 죽기 전에 4권 좀 써줘..) 1권만 있다면 어쩌면 레젼드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1권을 쓰고 작가가 세상을 떠난다던지(미안해 하루키씨!) 아니면 절필을 선언한다던지(뭐.. 개인적으로 실력 있는 작가의 절필을 매우 싫어하지만) 그랬다면 넌 이미 전설의 하루키. 어쨌거나! 그만큼 괜찮은 하루키씨 덕분인지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서 하루키 풍의 작가가 대거 등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씁쓸하기도 했다. 다들 비슷비슷한 짝퉁이라는 느낌밖에 못 받았지만.

하루키 소설의 약간의 공통된 특징이라면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일단 단정하면서 일상적인 생활의 반복에 집착에 가까운 사람이 등장한다. 또 꿈과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데 그것이 하루키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테지만 해변의 카프카와 같은 정도의 넘나듦은 찬성이지만 어설픈 넘나듦은 소설에 대한 무책임함이 보이기도 한다. 1Q84에서 임신이 그랬다! 그 시점에서 온갖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너무 화가 났다. 눈물이 날 지경.. (이게 무슨 소린가? 하시는 분은 1Q84를 읽어보시라!) 그리고 주인공은 뭐랄까 어둡게 괴로운 청년이고 어떤 여자는 보편적으로 보면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어떤 부분이 매력적이라서 전체적으로 호감이 가는 뭐 그런 설정. 그리고 한 번씩 꼭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한다.

개인적으로는 하루키씨의 수필은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수필의 몇몇 에피소드는 술자리나 친구들과 모임에서 요약해서 이야기해주기도 하는데 단 한 번도 실패한적 없이 다들 너무 재미있다고 그 책의 제목이 뭐냐고 물었다. (‘하루키의 여행법’추천!)

본론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로 돌아오자. 책 제목이 겁나 길어서 책의 중반까지 설마 이게 책 제목인지 몰랐다. 책 제목 따로 있고 저 긴 글은 부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ㅋ 어쨌거나! 일단 책의 첫 부분에서 쓰쿠루(만들다의 일본어인 쓰쿠루인인데 왜 ‘쯔쿠루’가 아닌 ‘쓰쿠루’로 번역했을까? 검은색의 ‘쿠로’도 ‘구로’로 번역했다. 해서인지 구로동이 생각나더군)는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면서 이야기가 그리 전개되지는 않으면서 페이지만 늘어난다. 내가 그렇게 까는 1Q84는 적어도 1권에서는 목을 졸라서 벽에 붙이고는 숨 막히게 하는 손을 뗄 수 없는 재미라는 것이 있었는데 미안하지만 이 책은 없다. 재미가 있을 법도 했는데 없다. 냉정하게 까자면 하루키 작풍에 영향 받은 젊은 작가가 교묘하고 신중하게 그를 따라 소설을 썼지만 실패한 듯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이 할아버지가 65살이나 되었다곤 믿기지 않는다는 것!)

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물론 1Q84처럼 많은 물음표를 던지는 책은 아니었다. 소설이 짧은 만큼 물음표도 몇 개 없었다. 아마도 시로는 강단 당했겠지. 그래서 종국에는 그렇게 살해당했겠지. 누군가 익명에 의해서. 그렇게 해석하자. 잠깐 그럼 수영을 같이하던 연하의 친구는 어떻게 된 거야? 사라와의 열린 결말은 상실의 시대가 오버랩되면서 슬쩍 이해가 가긴 한다. 아니 잠깐만 그럼 손을 잡고 걷던 중년의 남성은 누구야? 그나마 다행인건 물음표가 여기 적은 것뿐이라는 점이다.

어제 책을 다 읽고 개와 함께 산책을 하며 공원을 한참을 걸었다. 하루키는 그냥 6번째 손가락과 몸에서 나오는 색이 보이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적절하게 그 이야기들을 어울러서 간단하게 쓴 책인지도 모르겠다. 둘 다 그냥 흔하게 돌아다니는 이야기임을 감안하면 흥미롭게 썼다. 완벽한 5개의 손가락처럼 완전무결했던 다섯 사람에게 (독수리 오형제!) 쓰쿠루의 도쿄진학이라는 요소는 불필요한 6번째 손가락이 등장하면서 그룹이 위기에 처하는 걸까? 아니면 원래부터 홀수이자 소수라는 5라는 숫자와 짝이 안 맞는 성비가 문제였을까? 그래서 그 중 한명은 남자가 좋아져버린 자신을 발견한 걸까? 수영을 같이하던 연하의 친구와의 6번째 손가락은 무엇이었을까? 왜 말도 없이 사라졌을까? 아버지처럼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죽음을 전달해주기라도 한 걸까?
왠지 시로도 죽음을 전달 받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으리라. 완전무결한 5명에게 태아라는 6번째 손가락이 등장하고 이 후 사라졌음에도 시로 가슴속의 주머니 안에는 그 손가락이 들어있어서 피아노위에 가만히 올려져 있었으리라.
사라와의 6번째 손가락은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같이 웃던 중년의 남자. 모두 이렇게 사람은 저마다의 6번째 손가락을 가지고 있나보다.

사람마다 에너지가 있다든지 그 사람을 감싸는 어떤 색이 보인다던지. 그것을 ‘기’라고 하던 에너지라고 하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의 연장에서 자신의 이름에 색이 없어서 고민인 청년의 짧은 순례를 가볍게 잘 읽었다. 요약하자면 가볍게 읽긴 좋다. 이젠 하루키씨의 소설에서 인과관계나 결말 따위는 전혀 기대하지 말아야겠다. 그가 살아있고 저작활동을 계속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하루하루가 의미 있다고 중2병처럼 생각하던 나날이 있었는데 내가 커버린 것인지 하루키가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당분간 그의 장편소설을 기다리진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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