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숨그네 - 헤르타 뮐러

숨그네 - 헤르타 뮐러 

유난히 손이 안가는 책이 있는데,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가 나에겐 그랬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걸 본지도 벌써 2년째인데, 잡아서 읽고 싶지가 않았다. 우울한 검은색 표지와 웅크린 소녀의 모습 같은 것이 몇 번이나 손에 잡았다가 첫 장도 읽지 않은 채 다시 책장으로 돌려두기를 반복하게 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비 온 뒤 흐림, 다시 비, 그리고 다시 흐림을 반복한 어느 저녁에 책을 꺼내서 다시 읽었다. 그 날씨와 맞았던 건지 내 기분과 맞았던 건지 책이 이틀 만에 읽혔다. 마지막엔  아껴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책을 놓지 못했다. 그것은 문장 때문이었다. 

어떤 책은 손에 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숨통을 막히게 하고, 어떤 책은 눈부신 문장이 나를 잡는데,  이 책은 문장이 나를 잡았다. 빠르게 읽는 책이 아니었다. 문장을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우울한 책의 현실과 달리, 문장이 빛났다. 아름다웠다. 

"나는 그가 흐뭇해하는 꼴을 보기 싫어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작업 하나하나가 예술이죠.
그가 석탄가스와 배고픔의 혼합에 대해 털끝만큼이라도 알았다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지하실 어디에 발을 딛나.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날아다니는 석탄재 위에 발을 딛죠, 날아다니는 재도 일종의 차가운 슬래그였으니까. 재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온 지하실을 털로 덮었다. 날아다니는 재도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나풀거리는 재는 무해하다. 쥐색에 보드랍고 냄새가 없으며, 작디작은 비늘 조각 같다.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된서리처럼 달라붙지 않는 곳이 없다. 모든 표면을 뒤덮는다. 불빛 속에서 날아다니는 재는 백열등을 감싸고 있는 철망을 빈대, 이, 벼룩, 흰개미와 함께 서커스 우리로 만들었다. 흰개미는 날아다니며 교미한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흰개미가 수용소에 산다는 것도 배웠다. 왕개미와 여왕개미, 병정개미가 있다. 병정개미는 머리가 크다. 턱 병정, 코 병정, 분비기관 병정. 이들 모두 일개미가 먹여 살린다. 여왕개미는 일개미보다 삼십 배나 크다. 배고픈 천사와 나 혹은 베아 차켈과 나 차이도 그 정도인 것 같다. 투어 프리쿨리치와 나도 그렇고." - p.198~199 숨그네, 헤르타뮐러, 박경희옮김, 문학동네

우울한 수용소 생활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책 내용 자체는 수용소에서의 에피소드가 짧게 짧게 이어지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이런 아름다움이 책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요즘 내가 광적으로 좋아하는 장르는 - 전직  FBI비슷한 요원이 조직에서 제외되고, 혼자서 비밀을 파헤치고 어마어마한 악당들을 대락 소탕한 뒤, 나라도 구하고 마지막엔 가족을 구하는 - 뭐 그런 내용이였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것과는 달랐다. 말하자면 제목인 '숨그네'같은 것이였다. 숨그네라는 단어가 책에 씌인 순간 그 단어를 대신하는 단어는 사라졌다. 심장박동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호흡의 규칙적인 운동? 아니다. 숨그네는 숨그네 였다. 

"한꺼번에 쏟아져내리므로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위가 조여든다. 그 느낌은 점점 올라와 입천장에 닿을 것 같다. 숨그네가 공중을 한 바퀴 돌고, 나는 헉헉거린다. 배고픔이 괴물이듯 그런 이빨빗바늘가위거울솔은 괴물이다." - p.37

17세 레오는 수용소로 끌려간다. 가족과 친척들이 저마다의 물건을 준다. 하지만 그건 곧 소금과 설탕으로 바뀐다. 그런 레오에게 할머니는 너는 돌아올 거라고 말한다. 처음엔 그저 집에서 나가고 싶어하던 소년은 배고픈 천사와 피곤함, 무지 피곤함, 죽도록 피곤함과 마주한다.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가지만, 막상 수용소의 사람들은 전쟁과는 상관없는 인물들이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여자와 평범한 재단사와 이발사가 있다. 레오는 5년을 그곳에서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집에서도 그는 영원히 외톨이다. 

처음에 나는 그가 넵튠 수영장에서 만나는 인물이 전쟁과 관련된 음모를 꾸미는 인물인 줄 알았다. 그랬기에 그가 무언가를 들켜서 잡혀온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명아주를 뜯어 먹고 시멘트 먼지를 뒤집어쓴 레오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수용소에서의 욕망을 참고 5년 뒤 그는 연주자가 되고, 피아노가 된다. 그는 가명을 쓰는 동성애자다. 그는 부인 애마에게 말한다. 나는 '안' 돌아올 거야. 이 동성애자라는 묘한 설정이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결국은 이야기를 이끌어가게 했다. 헤르타 뮐러가 책을 쓰려고 하고 인터뷰했다는 오스카라는 인물이 실제로 동성애자였을까? 

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돌아온 레오가 집에서 느낀 외로움은 책의 어떤 부분보다 슬펐다. 살아 돌아온 레오에게 이젠 가족의 따뜻함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텐데. 엉뚱하게도 그는 외톨이가 된다. 소년의 추억은 과거가 된다. 

"어린 시절 엄마와 피니 고모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정원을 뛰어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난생처음 잘 익은 딸기를 보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리 와 봐요. 여기 개구리가 불타고 있어요." - p.200

소년은 더 내려갈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다. 

"왜 하필 273개냐.
영하 273도는 절대 영도니까요, 내가 말한다. 더 내려갈 수는 없어요. 
오늘은 웬 과학 타령이냐. 그가 말한다. 잘못 센 건 아니고,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말한다. 273이라는 숫자는 스스로 삼가거든요. 절대영도는 가설이잖아요." - p. 222

왜 자신의 형제를 대리형제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리형제가 있는 집은 더는 레오의 집이 아니다. 너는 거기서 죽어도 돼. 어머니는 엽서의 여백에서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향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내용이 없어지고 구체적이 고향과 전혀 상관이 없어지므로 연기를 내며 타다가 결국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쪽이다." p.260
"내 가족이에요. 하고 말하면서 떠올리는 건 수용소 사람들일 것이다." - p.290
"우리는 서로 더이상 우리가 아님을, 다시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 p.304
"로베르트에게 나는 새로운 객체일 뿐이었다. 몸을 지탱하려고, 아니면 내 무릎에 뭔가를 놓으려고 가구인 듯 나를 만졌다. 그리고 내가 자기 서랍이라도 되는 양 내 주머니에 모피를 쑤셔 넣었다. 나는 서랍인 듯 가만있었다." - p.307
"나는 풀려난 몸으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고 자기를 기만하는 증인이 되었다." - p.316

수용소에 풀려난 뒤 마지막 50페이지가 가장 슬펐던 이상한 소설 숨그네.
우울하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숨그네.
수용소에서는 현재를 살던 소년이 풀려나서는 영원히 과거에 산 이야기. 




+ 책표지(나는 지금 잃어버려서 없지만)는 소녀가 아니라 소년인 듯하다.
+ 헤르타 뮐러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이란다. 후덜덜덜;; 책이 심상치 않더니만.;; 선정이유는 "응축된 시와 진솔한 산문으로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그려냈다." 

댓글

  1. 주인공이 동생을 대리형제라는건, 어머니가 자기 대신으로 삼은 형제라는 겁니다. 자신은 끌려가서 죽은 것으로 치고, 어머니가 모성애를 쏟을 대상을 바꿨다는 거죠. 버려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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